실천/독서

《여행의 이유》 김영하 산문

sosimpool 2020. 7. 20. 07:56

《여행의 이유》김영하 지음, 214page, 문학동네

P16 나는 어느 나라에 가든 식당에서 메뉴를 고를 때 너무 고심하지 않는 편이다. 운 좋게 맛있으면 맛있어서 좋고, 대실패를 하면 글로 쓰면 된다.


P18 음식 주문에서 실패를 줄이고 싶다면 모든 분류의 가장 위에서부터 고르면 되고, 재료는 닭을 선택하는 것이 안전하다. 겉에 뭐가 발라져 있든, 무엇에 재웠든, 속에는 우리가 아는 그 닭고기가 있다. 그러나 자기 여행을 소재로 뭔가를 쓰고 싶다면 밑에서부터 주문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때론 동행 중에서 따라 시키는 사람이 생기고, 그 인상적인 실패 경험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걸 글로 쓸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P18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P22 여행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뜻밖의 사실'이나 예상치 못한 실패, 좌절, 엉뚱한 결과를 의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P24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P110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로부터 해방시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그래, 나는 여행을 하고 제작진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시청자는 그중 아주 일부를 보게 되겠지.


P117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는 '방구석 여행자'이다. 우리는 여행 에세이나 여행 다큐멘터리 등을 보고 어떤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품는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그곳을 다녀온다. 그러나 일인칭으로 수행한 이 '진짜'여행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 때문에 제한적 일수 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 모두는 그곳을 '다녀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 우리는 또다른 여행서나 TV의 여행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이미 다녀온 곳을 그들이 여행하는 모습을 보거나 읽게 된다. 나와는 다른 그들의 느낌과 경험이 그들의 언어로 표현되어 내 여행의 경험에 얹힌다.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접 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P127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타인의 환대가 필요하고, 적절한 장소도 주어져야 한다.


P183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P202 기차는 거의 대부분 정시에 운행되었고 여행은 대체로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었다. 매순간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비행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 든다. 휴대전화 전원은 꺼졌다. 한동안은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P203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P205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게 돈도 안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P212 꽤 오랜전부터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 여행은 나에게 무엇이었나, 무엇이었기에 그렇게 꾸준히 다녔던 것인가, 인간들은 왜 여행을 하는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답을 구하고 싶었다. 


P213 '여행의 이유'를 캐다보니 삶과 글쓰기, 타자에 대한 생각들로 이어졌다.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