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김언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354페이지
" 이 캐비닛의 이름은 '13호 캐비닛'이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캐비닛이다."
꿈독 독서모임의 3월 책으로 선정된 《캐비닛》을 빌려 왔는데 웬지 손이 가지 않아 방치(?)되어 있다가 한 달만에 책을 펴서 읽어 보았다. 그리곤 3일만에 완독.
궁금했다.
작가는 왜 제목을 캐비닛이라고 지었을까?
대체 무슨 내용일까?
작가는 뭘 말하고 싶었던걸까?
"화산폭발이 일어나 '상피에르'라는 도시를 쓸어버렸다"
화산폭발로 사라진 도시와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저 실바리스라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불분명하고 이해하기 힘든 죄목으로 높은 첨탑에 갇혀 이십사년동안 첨탑의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덕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그는, <상피에르 사람들>이란 글을 썼고, 그 내용은 참 이상하다.
"클리오레 신부의 엉덩이에는 오소리 꼬리가 달려 있었다. 데스먼드 주교의 엉덩이에도 오소리 꼬리가 달려 있었다."
"이것은 죄도 없는 자신을 첨탑 꼭대기에 이십사년동안 감금해놓고 야유를 보낸 상피에르 사람들에 대한 루저 실바리스의 저주일까?"
"나는 가끔씩 서재로 들어가 <상피에르 사람들>을 꺼내 몇 페이지씩 읽어보곤 한다."
26페이지, 드디어 '나'의 정체가 밝혀진다.
"나는 지난 칠년간 13호 캐비닛의 한 부분을 담당해온 관리자이므로 이 정도 사실에 크게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Y공기업의 부속 연구소에서 일하는 나는 무료함을 견디다못해 캐비넷안의 자료들을 몰래 훔쳐보다가 결국 그 캐비닛을 관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캐비닛에는 온갖 '심토머'들에 대한 자료들로 가득하다.
"변화된 종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마땅한 정의가 학계에 나와 있지 않아 우리는 그들을 '징후를 가진 사람들' 혹은 '심토머'라고 부른다....그들은 현재의 인간과 새로 태어날 미래의 인간 사이, 즉 종의 중간지에 있는 사람들이다....심토머들 중에는 손가락에서 선인장이나 포도나무가 자라는 사람도 있고, 몸의 일부에서 도마뱀의 형질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동시에 완벽하게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자가 수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심토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 휘발유/유리/강철/신문지 등을 먹는 사람
-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 시간을 잃어버리는 현상을 겪는 사람(타임스키퍼)
- 입 속에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
- 매우 긴 잠을 자는 사람(토포러)
- 도플갱어
- 자신의 일기를 읽고 부끄러운 과거를 고치면 고쳤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 수정된 과거가 기억을 지배하는 사람. (메모리모자이커)
- 이쑤시개가 된 사람
-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동시에 가진 사람(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 서로의 육체를 교환하는 사람들(다중소속자)
- 몸이 두개인 사람
그리고 특이한 사람들
- 총무과 손정은씨 : 혼자 다니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일하고, 혼자 퇴근한다.
- 고양이가 되고 싶은 황봉곤씨
- 마법사라 불리는 사람
- 외계행성에 전파를 보내는 사람들의 모임
- 자신의 침대밑에 악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러던 어느날, '키메라 파일'을 찾는 K라는 인물이 '나'에게 접근해 거액을 제시하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마지막장에 '주의사항'이 있다. 소설에 푸욱 빠져서 읽다보면 '어? 정말로 있는 일인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주의사항이 없었다면 진실로 착각하게 만들만큼 한명한명의 심토머들은 생생하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정보들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오염된 것이므로 모든 곳에서 정당한 논거로 사용될 수 없음을 밝힙니다....혹시라도 이 소설의 내용을 사실적이거나 과학적인 논거로 사용할 시에는 이 점에 특별히 유의하여 망신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작가는 왜 이런 괴상한(?) 이야기를 썼을까? 라는 내 궁금증은 "외계인 무선통신편"에서 해소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집 마당이나 옥상에 거대한 안테나를 올리고 고출력 증폭기를 이용하여 매일 여섯시간에서 열두시간씩 외계행성으로 꾸준히 전파를 보낸다.
.... 지구 밖으로 무언가를 날려보내는 일에는 돈이 많이 든다.
.... 그러니까 두식씨는 하루에 열두시간씩 냉동트럭을 운전하고 거기서 번 대부분을 외계인에게 송금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우리는 지구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외계인 후손들입니다'
.... '외계인 무선통신'의 회원들은 크게든 작게든 모두 다 의사소통과 대인관계에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 '외계인 무선통신'의 회원들은 지구에서 성공하기 위해 아등바등거리지 않는다. 이곳은 자신의 고향이 아니며 자신의 삶의 터전이 아니다. 지구는 그들에게 외계행성이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원숭이 무리에서 명예로워지거나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이 지구 위에서는 그렇다."
가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을 마주할 때면, '저 사람은 뭐지?'하고 생각할때가 있다. 작가님은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월급을 쏟아부으면서 외계로 전파를 쏘아보내는 일이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미친것처럼 보일지라도, '외계인 무선통신'사람들에게는 삶의 유일한 목적이랄까. 가장 중요한 일인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나의 잣대로 판단하기전에, 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어떤 그 사람만의 중요한 목적이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코로나의 시간을 '견디고'있는 나에게 참 와닿았던 구절.
천국에서 권박사가 물었다.
"요즘 어때?"
"아주 나빠요. 도대체 이 섬에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글쎄, 꼭 뭘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냥 자네의 시간을 견뎌봐. 인생이란 그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한 거니까."
"캐비닛처럼요?"
"그래 마치 캐비닛처럼"